단지 한가운데 펼쳐진 잔디밭. 아이들 노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제공
▶ 최근 경기도 남양주시 불암산 자락에 ‘아파트 공동체’가 생겼다. 협동조합 아파트 ‘위스테이별내’는 생기기 전부터 새로운 공동체 실험으로 주목을 끌었다. 건설사 대신 협동조합과 조합원이 주인이 되는 아파트 단지는 혁신적인 아이디어 같지만 과연 잘 운영될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수연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이 이곳에 석달째 살아본 경험을 전한다. “언제 또 이렇게 많이 올라왔지? 카페 글 읽다 하루가 다 가겠네.” 오늘도 아파트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이 활기차다. 소독 문의와 중고물품 나눔은 아파트 게시판이라면 흔히 있는 글이지만 ‘백개의 학교’는 뭐고, ‘보컬 테크닉’이라니. ‘동네지기’는 누군데 ‘주간 브리핑’을 하지? 이 아파트의 정체가 궁금해지실 거다. 이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불암산 자락 아래 펼쳐진 둥근 잔디밭과 그 주위를 정겹게 둘러싼 일곱 동의 건물이 우리 동네 아파트 ‘위스테이별내’다. 탁 트인 초록의 잔디밭에는 햇볕과 바람, 아이들 노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곳곳에 보이는 ‘동네’ 간판들은 전부 커뮤니티 시설들이다. ‘동네카페’부터 ‘동네책방’ ‘동네체육관’ ‘동네창작소’ ‘동네키움터’ ‘동네돌봄터’ ‘동네부엌’ ‘동네텃밭’ ‘동네빨래터’까지.
지난 6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에 준공된 협동조합 아파트 ‘위스테이별내’에선 각종 공동체 실험이 한창이다. 단지 내 200명가량의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공동체텃밭에선 각종 행사 때 쓸 배추를 함께 기른다.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우리 아파트는 올해 6월 말 준공돼 지난 7월 입주를 시작했다. 결혼한 지 6년 된 우리 부부와 태어난 지 9개월인 딸, 나이 여든인 친정엄마로 구성된 우리 가족도 7월 초 이사했다. 다른 신혼부부들처럼 우리도 결혼 뒤 계속 1~2년 만에 이사를 다녀야 하는 세입자 생활을 하다 3년 전 위스테이를 알게 됐다. 위스테이는 국내 첫 ‘협동조합형’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뉴스테이)이다. 2016년 국토교통부가 기존 뉴스테이 사업 일부를 시범사업 형식으로 사회적기업인 ‘더함’에 맡겼다(주관사 선정). 다른 뉴스테이 사업은 건설사가 자금을 대지만, 위스테이는 491가구의 입주자들이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을 꾸려 그 구실을 대신했다. 입주자들은 협동조합을 통해 아파트를 간접 소유하는 임차인이자 집주인이 됐고, 건설사(계룡건설산업)는 건축시공만 도급으로 맡았다. 건설사로 가는 개발이익을 돌려 임대료를 낮추고 커뮤니티 공간과 운영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무엇보다 최소 8년 이상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고, 새로운 주거문화를 만들 것이란 말에 혹했다. 그래서 이름부터 생소한 별내라는 곳으로 와 이곳의 조합원이 됐다. 물론 걱정도 있었다. 협동조합이니 공동체니 말은 좋지만 개개인의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귀찮게 뭘 자꾸 시키진 않을까.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인데 잘될까. 동네에선 계속 착한 척만 해야 하는 걸까. 결국 서로 상처만 주고 끝나진 않을까. 사실 입주 초반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하자보수가 발단이었다. 크고 작은 하자들이 발견됐고, 하자 접수와 대응 과정에서 불만이 쌓였다. 부푼 기대를 안고 새집에 들어온 이들은 온라인 공간에 각종 불평을 쏟아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잘못된 정보가 흘러다니고 날카로운 말도 오갔다. 협동조합 아파트의 특성상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존재하는 복잡한 구조(사회적기업 더함과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건설사의 관계 같은)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다.
커뮤니티 오픈 위크.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역시 공동체는 꿈에 불과했나’라는 생각이 들 무렵, 누군가 다 같이 얼굴을 보고 얘기하자고 제안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이라며. 협동조합 임원도 아니고, 더함 관계자도 아니었다. 그냥 주민이었다. 스무명 정도의 주민이 모이고, 협동조합 이사장과 사무국장, 동네지기(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을 이렇게 부른다)가 모였다. 2시간가량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서로의 역할을 확인했다. 섭섭한 마음을 풀고 해결책을 찾아갔다. ‘앞으로 더 자주 이런 자리를 갖자’ 약속하고 웃으며 헤어졌다. 나도 그날 상황을 살피러 갔다가 감동하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막 퇴근한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주민들 진짜 훌륭한 것 같아, 협동조합 잘될 것 같아.” 동네지기가 ‘주간 브리핑’을 통해 아파트 관리 전반을 주민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다. 동네지기 역시 조합원이자 주민이다. 그리고 이제 이사 온 지 석달. 요즘 우리 가족은 각종 동네 모임에 나가느라 바쁘다. 휴직하고 육아를 전담하며 집순이 생활 중인 내게 동네 모임은 큰 활력소다. 난 주로 동네카페에서 모이는 육아동아리에 자주 참여한다. 역시 온라인에서 누군가 제안해 시작된 모임이다. 이들과 만나 신나게 수다를 떨고 웃고 나면 힘이 난다. 모임 시간이 되면 반가운 얼굴들이 동네카페로 들어선다. 카페 입장 전 마스크 착용과 체온 측정은 필수다. 여기서 코로나19가 발생하면 우리 동네는 끝이다, 그런 마음으로 다들 방역에 주의를 기울인다. 동네카페 인기 메뉴는 ‘바닐라 라떼’다.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이들도 모두 주민이다. 실제 개인 카페를 운영하는 주민이 있어 바리스타 교육을 하고 카페 운영 노하우도 전수했다. 카페에서 나오는 수익은 커뮤니티 운영 등에 재투자된다. 그러니 웬만한 음료는 동네카페에서 사 먹게 된다. 음료를 들고 중앙 잔디밭으로 나간다. 아기들도 엄마를 따라 나와 같이 뛰논다. 잠깐이지만 커피 한잔 들고 콧바람 쐬고 서로 돌아가며 아이들을 봐주는 틈에 잠시라도 쉴 수 있다.
최근엔 2살 미만 아가 엄마들 모임도 자주 연다. 엄마들끼리 동네키움터를 빌려 공동돌봄을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동네키움터는 우리 아파트 내의 작은 키즈카페다. 장판이 깔렸고 ‘볼풀장’도 있어 어린 아기들이 놀기 좋다. 주민 모임에서 공간 대여 신청을 하면 이용할 수 있다. 공동돌봄이 잘되면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엄마들끼리 서로에게 잠시 외출할 여유를 만들어줄 수 있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주말 아침의 요가 교실.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제공
’동네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주민들.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육아동아리 외에도 우리 협동조합 산하엔 돌봄위원회가 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단지 내 어린이집이 갑작스럽게 휴원했는데, 맞벌이 부부들이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찾지 못할 때 돌봄위원회 활동이 빛났다. 그간 돌봄위원회에서는 희망 주민을 대상으로 돌봄교사 양성교육을 진행했는데, 그분들을 통해 긴급보육을 할 수 있었다. 돌봄교사인 이웃이 집으로 방문해 아이들 식사를 챙기고 돌봐주었다. 이웃 간 서로 믿고 아이를 맡길 수 있게 협동조합이 중개 구실을 한 셈이다. 나도 여기 사는 동안 육아 걱정만은 덜 수 있겠다 싶어 든든하다. 남편은 막걸리학교와 밴드동아리에 참여한다. 막걸리학교에서 배운 대로 고두밥(지에밥)을 쪄 막걸리 빚기를 시도했는데, 정말 막걸리가 나왔다.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집집이 빚은 막걸리 사진이 올라온다. 남편은 돌아오는 추석 때 마실 막걸리를 또 만들겠다고 신이 났다. 반대로 밴드동아리에 갔다가는 음악 천재들이 너무 많다며 시무룩해져 돌아왔다. 우리가 별내로 오면서 함께 살게 된 엄마는 지난주 동네텃밭 배추 모종 심기 행사에 참여했다. 얼마 전에는 동네부엌에서 개최한 요리교실에도 다녀왔다. 60살 이상 ‘시니어 모임’에도 계속 나가고 계시는데, 부회장으로 활동하라는 추천을 받았다. 오랫동안 산 동네를 떠나오신 터라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하실지 걱정이었는데 기우가 되고 말았다. 동네 모임은 ‘동아리모임’과 ‘아파트관리 봉사모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아리모임은 주민들이 자유롭게 개설하고 모이는 장이다. 내가 참여하는 육아 모임, 남편이 참여하는 밴드 외에도 라인댄스, 캘리그래피, 미싱, 인라인, 탁구 등의 동아리가 운영된다. 동아리 활성화를 위해 협동조합에서 소정의 지원금도 준다. 아파트관리 봉사모임은 동네카페, 동네체육관, 동네텃밭 등의 커뮤니티 시설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모임이다. 우리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은 모두 주민이 운영한다. 체육관 기구 배치도 주민들이 직접 했고, 동네부엌 설비 점검과 청소도 주민들이 직접 한다. 협동조합 산하 공동체위원회와 돌봄위원회가 주축이 되고, 자발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조합원들이 모인다. 온라인으로 시시때때로 봉사자를 모집한다. “이번주에 동네체육관 지킴이가 부족합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동네키움방 청소하는데, 지금 시간 되시는 분들 와주세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대여섯명이 모여 체육관을 지키고 키움방을 청소한다. 어찌 보면 매우 귀찮은 일이다. 운동을 하고 싶으면 먼저 체육관 지킴이가 돼야 하고, 책을 읽고 싶으면 책 정리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또 선뜻 참여하는 이웃을 보면 고맙고 미안해진다. 막상 같이하면 동아리 모임과 다를 바 없다. 귀찮은 일인데도 즐겁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진다. 나도 ‘동네체육관 지킴이’를 하고 있는데, 46명이 참여하는 카톡방이 활기차다. 체육관을 이용하는 주민들에게 체온 측정이나 손소독제 사용, 운동 후 기구 소독 등 안전수칙을 전달하고 관리하는 구실인데, 시간을 정해 돌아가며 지킴이를 한다. 한데 정해진 활동 말고도 체육관 벽에 걸 시계를 기증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바닥 청소를 하고, 신입 지킴이에게 활동수칙을 알려준다. 이 사람들, 동네체육관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 누군가는 “헬스장에 ‘회원님’으로만 가다가 직접 운영에 참여하니 이게 더 재미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우리 아파트 모임의 끝판왕이라 할 ‘백개의 학교’가 드디어 개강했다. “누구나 배우고 가르치는 마을공동체 학습플랫폼을 지향”하는 백개의 학교에선 조합원이면 누구나 강좌를 열 수 있고, 누구나 그 강좌를 들을 수 있다. ‘백개의학교소위원회’가 신청을 받아 자율성, 개방성, 공동체성, 공공성, 민주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강좌를 개설한다. 유·무료 강좌 모두 가능하지만, 유료 강좌는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금으로 내 공동체에 기여한다. 한 학기는 12주 동안 이어지는데, 이번엔 보컬 테크닉, 피아노 개인레슨, 심유학당(한문 공부), 초등 6학년 함께 읽기, 마마엘 인형 만들기 등의 강좌가 열렸다.
코로나와 육아 때문에 멀리 나가기도 어려운데 집 앞에 바로 공원 같은 잔디밭이 있고 다양한 취미모임과 학습강좌가 열리니 마음이 풍요롭다. 공간이 있고, 공간을 채울 프로그램이 있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시간들이 쌓여 공동체가 되나 보다 싶다. 그리고 그 뒤에는 3년 전 협동조합 발기부터 시작해 지금의 사업구조를 설계하고 만들어온 우리 협동조합 임직원과 위원회 소속 조합원들, 사회적기업 더함의 노력이 있었다. 언젠가 새벽까지 이어진 조합 이사회 회의가 있었던 다음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동네지기의 얼굴이 퀭했다.(동네지기는 우리와 같은 라인에 산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수고가 많으시죠” 하고 인사를 건넸다. 우리 조합원들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산다면 언젠가 한번씩은 다들 임원이 되어보면 좋겠다. 나도 언젠가는 어떤 방식이든 조합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별빛장터’. 주민들끼리 필요한 걸 서로 나눈다.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제공
물론 여전히 우리 앞에는 많은 차이와 오해, 갈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층간소음의 고통을 호소하거나 반려동물 배변 처리 문제로 이웃과 틀어지는 일은 이곳에서도 여느 아파트와 다를 바 없이 일어난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살며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허황한 일일지 모른다. 사실 나도 관심 있는 사회운동에 대한 홍보성 글을 올렸다가 “아파트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인 글은 자제해달라”는 답글을 보고 가슴이 ‘쿵’ 했다. 나에게 공동체는 이런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는 공간인데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구나,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아직도 고민 중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함께 부대끼고 살아가는 시간이 쌓이면 이해도 늘 것이라 믿는다. 갈등이 없어야 좋은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을 잘 해결하는 게 좋은 공동체이고, 내 이웃들은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자질을 충분히 갖춘 사람들이니 말이다.
이수연 위스테이별내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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